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12·12 군사 반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권력 공백 상태에서 정승화를 중심으로 군 수뇌부가 단결하려 하자, 전두환 등 하나회는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은 정승화를 불법 체포하고, 육군본부와 대통령 경호실을 장악하여 권력을 획득했다. 이 사건은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군사독재를 연장시켰으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전두환은 권력을 장악하고, 관련자들은 처벌받았으며,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여러 작품이 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쿠데타 - 5·17 쿠데타
    5·17 쿠데타는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 이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 대한민국의 쿠데타 - 5·16 군사정변
    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은 제2공화국의 불안정과 혼란을 배경으로, 부패한 민정부 타도와 국가 재건을 명분으로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고 군사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 하극상 - 684부대
    684부대는 1968년 4월 공군 2325부대에서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창설되었으나, 남북 관계 변화로 1971년 실미도 사건을 일으켰으며, 냉전 시대 인권 침해 사례로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 노력이 진행 중인 특수 부대이다.
  • 하극상 - 바그너 그룹의 반란
    2023년 6월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은 러시아 국방부와의 오랜 갈등 끝에 무장 반란을 일으켜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했으나,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철수하며 러시아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과 군사적 약점을 드러냈다.
12·12 군사 반란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사건명12·12 군사 반란
다른 이름12·12 군사반란, 12·12 숙군 쿠데타
참가 세력신군부 (하나회 (전두환, 노태우 포함)) 대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군
장소서울
날짜1979년 12월 12일
결과신군부의 국군 장악
관련 URL12·12군사반란(十二十二軍事叛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 URL12·12 사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주요 관련자
신군부 지휘관전두환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유학성
노태우
장세동
허화평
차규헌
정부군 지휘관최규하
노재현
정승화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류병현
이건영
병력
신군부 병력제1공수특전여단
1대대
2대대
5대대
6대대
제5공수특전여단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
9사단
29연대
20사단
30사단
90연대
수색검문소
수도경비사령부
전차대대
헌병단
33헌병대
2차 헌병 특공대
101경비단
청와대 경호실
55경비대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
중앙정보부
30경비단
본부
기동타격부대
33경비단
기동타격부대
제3공수특전여단
특공조
정부군 병력대한민국 대통령실
한미연합군사령부
제9공수특전여단
5분대기조 대대
수도경비사령부
사령부 잔류 병력
1차 헌병 특공대
수경사 정문 위병소
제1한강교 검문소
육군본부
총리공관 특별경호대
육군특수전사령부
사령부 본부 행정중대
해군본부
육군총장 공관 해병대
30사단
행주대교 북단 검문소
개화초소
제1방공여단
국방부 방공포대
국방부
국방부 벙커 초소
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사단
결과 및 영향
결과신군부의 군권 장악
정승화 등 기존 육군 수뇌부 숙청
김재규 사형

2. 사건의 배경

10·26 사건 이후 군 수뇌부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국가 안녕을 위해 단결하기로 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건 수사를 맡았으나, 정승화가 사건 현장 가까이 있었고 김재규와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57]

1979년 11월 6일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 밝혔고, 정승화 총장의 신속한 조치로 사태를 수습했다고 말했다.[59] 그러나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58]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전두환을 군의 최고 실권자라고 보도했고,[60] 12월 9일 국방장관은 정승화의 건의로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려 했으나 유보했다.[61]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전두환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정승화 총장 체포 후, 제9사단 예하 제29연대는 제1, 3특전여단과 함께 전두환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진입했다. 장태완 소장과 정병주 소장도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정병주 소장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총격전 중 사망했다.[3][4]

다음날 아침,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노태우 소장, 정호용 소장 등 전두환의 육사 동기들이 한국 지상군을 지휘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는 하나회의 지원을 받았다.[5] 대한민국 해군과 공군은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두환은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을 끌어들였다. 전두환은 사실상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 쿠데타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0년 5월 17일의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 운동[6]은 전두환이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체포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2. 1. 10.26 사건과 권력 공백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 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한국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14] 이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선거를 통해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유신체제의 틀 안에서 선출되었지만, 권한대행 취임 직후 조기 헌법 개정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를 약속하는 담화를 발표했다.[15] 또한 대통령 취임 직후에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김대중의 자택 연금을 해제하는 등 독재체제 완화 조치를 취했다.[16]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암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소장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17][18]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과 제9사단장 노태우 소장을 중심으로 한 비밀 조직 "하나회" 소속 장교들이 군 내 요직에 임명되어 특혜를 받는 것을 문제 삼아, 이들을 군 중추에서 배제하고 하나회를 해체하려 했다.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제1군 동해안 경비사령부로 전보시키고,[19]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하여 하나회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정 총장은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유신체제 종식을 시도했고,[20] 이는 하나회 멤버뿐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많은 장교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군 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컸기 때문에, 많은 군인들은 유신 헌법에서 민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전두환과 하나회 그룹을 동지로 여겼고, 박정희 노선 부활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정승화 총장의 의도는 군 내부 정보망을 통해 하나회에 알려졌다. 중앙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정승화는 노재현 국방부 장관에게 전두환 전보 계획을 상의했으나,[21] 노재현은 다음 날 국방부 차관 등과의 회의에서 이를 전달했고, 이 계획은 전두환에게 알려졌다.[22]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등 하나회 그룹은 선제공격을 결심하게 된다.

2. 2. 정승화와 전두환의 갈등

10·26 사건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며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견제하려 했다. 반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57]

1979년 11월 6일,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김재규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정승화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고 김재규와 친분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8] 당시 검찰은 정승화에 대한 조사를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조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58]

11월 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전두환을 군의 최고 실권자로 보도했다.[60] 12월 9일, 정승화는 전두환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보시키려 했으나, 국방장관은 수사와 관련된 의혹을 우려하여 유보했다.[61]

이러한 상황은 신군부 세력의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전두환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허화평, 허삼수 등과 모의를 시작했고, 황영시, 노태우 등 선후배 장성들과 정승화 총장 연행을 모의했다.[62]

3. 전개 과정

12·12 군사 반란의 전개 과정은 크게 정승화 총장 강제 연행, 최규하 대통령 총리공관 무력 장악, 육군본부와 신군부의 대치, 진압 실패와 신군부의 승리로 나눌 수 있다.
정승화 총장 강제 연행 및 최규하 대통령 압박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 등은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를 동원하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36] 이 과정에서 정승화 총장 공관 경비병력과 반란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37] 박정희 암살 사건 당시 김재규에게 음식을 권유받았다는 이유로 정승화 총장에게는 내란방조 혐의가 씌워졌다.

청와대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과 작전담당관 고명승 대령은 대통령이 거주하던 총리공관 장악을 지시받았다.[71] 저녁 8시 20분, 하나회 핵심 멤버인 고명승 대령은 경호실 소속 55경비대와 101경비단 병력을 이끌고 총리공관으로 출동했다.[71] 저녁 8시 40분, 이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총리공관 병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최규하 대통령을 외부와 연락이 차단된 상태로 고립시켰다.[71]
육군본부의 대응과 진압 시도육군본부정승화 총장 연행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진압을 시도했다. 육군본부는 "진도견 1"을 발령하고, 수경사와 특전사에 쿠데타 진압을 지시했다. 그러나 수도권에 주둔하던 특수전사령부 예하 4개 공수특전여단 중 3개 여단장이 하나회 회원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의 주력 부대인 제30, 제33 경비단장 역시 하나회 회원이었다.

육군본부1공수여단이 육군본부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9공수여단의 출동을 요청했다.[78]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9공수 출동을 요청했다. 육군본부 지휘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미8군 벙커로 이동했다.[70] 그러나 1공수여단은 실제로는 영내에 있었고, 1공수여단 부여단장이 육군본부로 가던 중 제1한강교를 통과한 것을 1공수여단의 출동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73][74][75]

신군부 세력은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하극상으로 무력 제압하고 연행했다.
신군부의 군 장악과 진압 실패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의 제3공수특전여단,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미국북한의 남침을 우려하여 병력 출동을 자제하도록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종용했다.[70]

정병주 소장의 명령으로 9공수특전여단이 인천에서 출동했으나, 하나회 그룹은 육군본부 측에 병력 동원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9공수특전여단을 귀환시키는 신사협정을 제안했고, 육군본부 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회 그룹 측은 1공수특전여단을 철수시키지 않고[45] 신사협정을 파기했다.

1공수여단은 행주대교에서 30사단 병력을 무력화하고 서울로 진입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했다.[66] 이 과정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체포되고,[79] 정선엽 병장이 사망했다.[68] 3공수여단은 특전사령부를 기습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김오랑 소령을 사살했다.[80][47] 장태완 소장은 진압을 시도했으나 부하들에게 제지당하여 진압을 단념했다.[48]

노재현전두환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계엄사령관 체포를 결재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에 재가했다.[72] 이로써 12.12 사태는 사실상 종결되었고, 신군부는 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3. 1. 신군부의 쿠데타 모의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정승화 제거 및 군부 장악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동조 세력을 규합했다.[2]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으로부터 정승화 연행 세부계획서를 받고, 허삼수와 우경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지시했다.

12월 12일, 전두환은 동조 세력들을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에 집결시켜 시내 장악 계획을 지시했다.

3. 2. 정승화 총장 강제 연행

12·12 군사 반란 당시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우경윤은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를 동원하여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36] 이 과정에서 정승화 총장 공관 경비병력과 반란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37] 반란군은 박정희 암살 사건 당시 김재규에게 음식을 권유받았다는 이유로 정승화 총장에게 내란방조 혐의를 씌워 체포했다.

3. 3. 최규하 대통령 총리공관 무력 장악

전두환 등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 재가를 요구했으나, 최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의 승인 없이는 절대 결재하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37] 그러나 당시 대통령경호실 실장 대리를 맡고 있던 정동호 준장은 하나회 멤버였고, 그 지휘부 장교들도 대부분 하나회 멤버나 그 주변 인물들이어서 쿠데타에 동조했다. 전두환 측은 정동호를 통해 대통령 경호부대까지 이용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국무총리 공관[44]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육군헌병대를 무장 해제하고 제압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실질적으로 차단했다.

3. 4. 육군본부와 신군부의 대치

육군본부정승화 총장 연행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진압을 시도했다. 21시 30분경 1공수여단이 육군본부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첩보가 전달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 첩보로 인해 육군본부는 9공수여단의 출동을 요청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9공수 출동을 요청했다.[78] 육군본부 지휘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미8군 벙커로 이동했다.[70]

당시 1공수여단은 영내에 있었고, 박희도는 30단에 있었다. 1공수여단 부여단장 이기룡이 작전지시를 받기 위해 육군본부로 가던 중 제1한강교를 통과한 것을 1공수여단의 출동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73][74][75] 여러 보고서와 기사의 내용, 그리고 1공수 부여단장 및 관련자 진술이 서로 불일치한다. 박희도가 부대에 복귀한 13일 00:00까지 1공수여단은 지휘 공백 상태였다.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이 공격한다고 판단하여 9공수를 출동시키고 30단 공격을 시도했다. 보안사령부는 이를 30단 공격으로 판단하여 대전복작전을 수행했다. 신군부 세력은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등을 하극상으로 무력 제압하고 연행했다.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1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의 3공수특전여단, 장기오 준장의 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미국북한의 남침을 우려하여 병력 출동을 자제하도록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종용했다.[70] 13일 밤 2시, 전두환이 결재를 요구하는 가운데 9사단 병력의 움직임이 보고되자 대통령은 노태우 소장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했다.[72]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월 20일 '남한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보고서를 작성했다.[83]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평시 작전통제권 관련 합의 위반에 대해 불만을 표명하고 민간정부 지지 입장을 밝혔으나, 보름 뒤 비판 어조가 누그러져 군부 내 반란을 사실상 묵인했다.[84]

전두환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승화 장군 체포를 지원했다. 9사단 예하 제29연대는 1공수특전여단, 3공수특전여단과 함께 전두환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진입했다. 장태완 소장과 정병주 소장이 반란군에 체포되었고, 정병주 소장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총격전 중 사망했다.[4]

다음날 아침,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전두환노태우, 정호용 등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이 한국 지상군을 지휘했다. 전두환의 쿠데타는 하나회의 지원을 받았다.[5] 대한민국 해군공군은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두환은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을 끌어들였다.

1공수특전여단에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고, 주한미군과의 연합사령부 통제 없이 9보병사단과 2기갑여단 등 일부 병력이 노태우 소장과 황영시 중장의 명령에 따라 서울로 진군하여 중앙청을 장악하려 했다.[41]

대통령경호실 실장 대리 정동호 준장과 지휘부 장교들은 하나회 멤버이거나 주변 인물들이어서 쿠데타에 동조했다. 전두환 측은 정동호 준장을 통해 대통령 경호부대를 이용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있는 국무총리 공관[44] 경비 담당 육군헌병대를 무장 해제하고 제압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정병주 소장의 명령으로 9공수특전여단이 인천에서 출동했다. 하나회 그룹은 육군본부 측에 병력 동원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9공수특전여단을 귀환시키는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측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하나회 그룹 측은 1공수특전여단을 철수시키지 않고[45] 신사협정을 파기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제압 점령되었고, 노재현 국방부장관도 "확보"되었다. 3공수특전여단 병력에 기습을 당한[46] 정병주 소장은 구속되었고, 김오랑 소령은 사살되었다.[47]

장태완 소장은 진압을 시도했으나 부하들에게 제지당하여 진압을 단념했다.[48] 장태완 소장 이하 수도경비사령부 관계자들과 육군본부 관계자들은 구속되었다.

노재현전두환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계엄사령관 체포를 결재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에 재가했고, 정승화 총장은 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예편되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80년 1월 20일자로 강제 예편되었다.

3. 5. 진압 실패와 신군부의 승리

진압군은 지휘 체계 혼란과 신군부의 방해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2월 13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했다.[72] 신군부는 군 수뇌부를 장악하고,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21시 30분경, 육군본부1공수여단이 육군본부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첩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당시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73][74][75] 육군본부는 9공수여단에게 출동을 요청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9공수여단 출동을 요청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육군본부 지휘부는 수경사 영내로 이동했고,[78]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미8군 벙커로 이동했다.[70]

하지만 당시 1공수여단은 영내에 있었고, 지휘관인 박희도는 30단에 있었다. 1공수여단 부여단장 이기룡이 작전지시를 받기 위해 육군본부로 가던 중 제1한강교를 통과한 것을 1공수여단의 출동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다.[73][74][75]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1공수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공수여단, 장기오 준장의 5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우려하여 병력 출동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70]

13일 밤, 전두환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연행 재가를 요구했고, 노태우 소장은 9사단 병력을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72]

1공수여단은 제1한강교에서 차단되었으나,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하고 서울로 진입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했다.[66] 이 과정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체포되고,[79] 정선엽 병장이 사망했다.[68] 3공수여단은 특전사령부를 기습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김오랑 소령을 사살했다.[80][47]

새벽 3시 30분경, 신현확 총리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데려갔다.[72] 새벽 4시 30분경, 보안사는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연행했다.[81]

새벽 5시,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 연행을 사후 재가했다.[72] 이로써 12.12 사태는 사실상 종결되었고, 전두환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4. 반란 이후

12·12 군사 반란은 군 내부의 숙군을 목적으로 일어났지만, 5·17 쿠데타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소장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서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승화 장군 체포를 지원했다.

정승화 장군 체포 후, 제9보병사단 예하 제29연대는 제1특전여단과 제3특전여단과 함께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 도심으로 진입했다. 장태완 소장(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소장(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도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정병주 소장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총격전 중 사망했다.[4]

다음날 아침까지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모두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전두환과 그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제9보병사단 사령관 노태우 소장, 정호용 소장 등)이 한국 지상군을 지휘했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그 이후의 권력 장악은 하나회의 지원을 받았다.[5] 대한민국 해군공군은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두환은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을 끌어들였다. 전두환은 사실상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 쿠데타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5·17 쿠데타5·18 광주 민주화 운동[6]은 전두환이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체포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4. 1. 신군부의 권력 장악

12월 14일,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82]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72] 1980년 1월, 군 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이후에도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 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87]

12·12 군사 반란은 숙군 목적을 띤 군 내부의 반란이었지만, 신군부는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다.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지만, 신군부는 5월 17일에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8월 27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89]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4. 2. 관련자 처벌과 역사 바로 세우기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91]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졌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2.12 사건 기소 유예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헌법재판소1995년 1월 20일 12·12사건 기소유예처분취소청구에 대하여 각하 및 기각 결정을 내렸다.[92] 1995년 7월 검찰은 5ㆍ18 사건은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에서의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2·12, 5·18 사건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다. 고등법원에서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경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노태우 등에게 반란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5. 평가

12·12 군사 반란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군사독재를 연장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2·12 사태 직후,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월 20일 '남한 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상황판단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83]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 간 합의를 위반한 데 대해 백악관과 미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민간정부만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보름 뒤 신군부 세력에 대한 비판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군부 내 반란을 사실상 묵인했다.[84]

5. 1. 부정적 평가

12·12 군사 반란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군사독재를 연장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신군부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제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하려는 등 정치군인들을 견제하려는 정승화 총장의 인사조치 계획 때문이었다.[95]

신현확 전 부총리는 상관을 체포하는 행위가 군 내부의 계통을 제거하고 전군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72]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에게 6개월 후 대사장관 이상의 자리를 보장하며 설득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쿠데타 계획이 치밀하게 짜여졌음을 느꼈다고 한다.[97]

김수환 추기경은 이 사건을 서부 활극에 비유하며, 총을 먼저 빼 든 사람이 이긴다는 말을 전두환에게 전했다.[99] 탄허 스님은 정승화 총장이 자신의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질책했다.[100]

조갑제 전 조선일보 기자는 1공수여단의 서울 진입이 12·12 군사 반란의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평가했다.[101] 임기상 CBS노컷뉴스 기자는 진압군으로 출동했다가 회군한 제9공수여단이 쿠데타의 분수령이었다고 보도했다.[102]

이 쿠데타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0년 5월 17일의 군사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 운동은 훗날 전두환이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체포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5. 2. 긍정적 평가

허화평 전 대통령 정무수석은 대법원 재판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불법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합동본부수사기관장은 대통령의 허가가 없어도 자체 판단에 의해 상대를 연행, 수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대규모 병력 동원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장태완 장군이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자 ‘살기 위해’ 임무 수행 차원에서 동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공 주역들은 (반란군으로 규정되어) 훈장, 연금을 몰수당했고,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견뎌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반란군, 진압군 양측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으나, 역사적 평가까지는 '정치 재판'의 결과와 같다고 믿을 수는 없으므로 최소한 훗날에는 제대로 된 역사적 기술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103]

신윤희 전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도 허화평과 비슷한 주장을 하며 12.12는 군사반란이 아니라는 취지의 책을 장태완이 사망하고 2년이 지난 2012년 출간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수사관과 경호관들이 충돌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총장을 구출하기 위해 수경사 사령관, 육군본부가 대응 조치한 것 때문에 일이 커지고 꼬이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81]

신군부 측은 10·26 사건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신군부의 주장이 당시의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5. 3. 논란

1공수특전여단의 최초 출동 시간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장태완, 윤성민 참모차장은 1공수특전여단이 12일 21시 50분 경 먼저 출동[104]했으며, 이것이 막히자 나중에 행주대교를 건너 육군본부로 진군했다고 주장했고, 12.12 사태에 대한 진압군 측 문헌 대부분은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1공수특전여단이 육군본부를 향해 출동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13일 0시가 지나서다. 이러한 오보는 12.12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공수가 육군본부를 향해 출동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육군본부는 9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을 명령[104]하고, 육군본부 지휘부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이동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감청이 되지 않는 미군 영내로 이동했다.[104] 이후 장태완은 1공수특전여단이 먼저 진격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30경비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고, 이 공격명령에는 사실상 1공수 지휘관에 대한 사살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78] 박희도는 자신이 사살 대상자임을 알고 있었으며[70] 경복궁에서 1공수특전여단으로 복귀할 때 육군본부측이 반역자라는 생각을 했다.[70] 1994년 2월 22일 이기룡의 진술에 따르면, 이 사살 명령으로 1공수여단 부여단장 이기룡은 제2한강교에서 체포되어 항의할 경우 사살될 위험이 있었다.[74]

쿠데타 진압과 대전복작전의 차이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합수부측과 육군본부 측은 서로 상대방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육군본부는 계엄사령관을 대통령 재가 없이 연행한 것을 쿠데타라고 주장하는 반면, 합수부는 조사를 위해 연행한 것은 불가피하며 최소한 쿠데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장태완의 공격명령에 대해서도 장태완은 합수부측에서 먼저 1공수여단을 출동시켰다고 하지만, 합수부 측은 그런 일이 없으며 오보였고, 오히려 육군본부가 먼저 30경비단을 공격하려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은 대통령 허가가 필요하지만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반역자라고 주장한다. 육군본부 주장의 근거는 1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이 먼저라는 것이지만, 이는 육군본부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은 사실이나, 실제로는 22:00 경 1공수특전여단은 출동한 기록이 없다. 1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이 13일 0:00시 이후라면, 먼저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은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으로 보인다. 그는 육필수기에서 12일 10:50분에 수경사 장교 450명 중 잔류한 60명에게 "역모자들을 체포 사살하라"고 명령했다고 서술했다.[78] 육군본부에 의해 9공수여단의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21:50분 1공수가 출동했다는 오보가 알려진 직후다.[105]

육군본부 측의 최규하 대통령과의 통화 시도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하려 했으나 최광수 비서실장이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끊었다고 주장했지만, 최광수 비서실장은 윤성민 참모차장과 직접 대화한 적이 없다고 법정에서 진술[106]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과 대화가 되지 않아 신현확 국무총리와 통화했고, 신현확은 "피해없이 지혜롭게 수습"하라고 했다고 주장[104]했지만, 신현확 국무총리는 윤성민 참모차장과 통화한 적이 없으며, 만약 통화했다면 옆에 있는 대통령을 바꿔주었을 것이라고 진술[107]했다. 최광수와 신현확의 진술을 보면,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통화를 시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최광수와 신현확의 진술에는 당시 육군본부와 통화를 합수부측에서 차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장태완의 30경비단 공격 명령이 대통령 재가를 받지 않고 대통령 경비부대를 공격한 것이 반역이라는 전두환 합수부측의 주장과 일치한다.

6. 관련 인물

12·12 군사 반란 당시 대한민국 육군 소장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서[2] 권한대행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정승화 장군 체포 후,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지원하기 위해 제9사단 예하 제29연대, 제1특전여단, 제3특전여단이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여 충돌이 발생했다. 대한민국 해군공군은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두환은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을 끌어들였다. 이로써 전두환은 사실상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 1. 반란군 (전두환 측)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체포될 때, 전두환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체포를 명령했다.[72] 이 과정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승화 장군 체포를 지원했다.[2]

정승화 장군 체포 후, 제9보병사단 예하 제29연대는 제1공수특전여단, 제3공수특전여단과 함께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 도심으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장태완 소장(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 소장(육군 특수전사령부) 등 정승화 장군의 동료들도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병주 소장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총격전 중 사망했다.[3][4]

다음날 아침,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모두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전두환노태우 소장, 정호용 소장 등 그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은 한국 지상군을 지휘했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그 이후의 권력 장악은 하나회라는 군 고위 장교들의 강력한 사조직의 지원을 받았다.[5]

6. 2. 진압군 (정승화 측)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12·12 군사 반란 당시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2]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반란 진압에 적극적이었으나, 진압에 실패하고 3개월 복역 후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강제 예편되었으며 가택연금을 당했다.[90]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휘하 부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보안사 취조실을 거쳐 강제 예편되었으며 가택연금을 당했다.[70]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사령관의 부관으로, 총격전 중 사망했다.[4]

장태완 수기에 따르면, 대세가 반란군 측으로 기울자 정병주, 김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배신했다.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도 진압군 측에 섰다.

6. 3. 기타

12·12 군사 반란 당시 주요 관련자들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육군 소장 전두환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서[2] 권한대행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전임 대통령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정승화 장군 체포를 지원했으며, 이후 쿠데타 이후 사임했다.

정승화 장군 체포 후, 제9사단 예하 제29연대는 제1특전여단제3특전여단과 함께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여 수도에서 일련의 충돌이 발생했다. 정승화 장군의 동료인 장태완[3] 소장(육군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소장(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도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병주 소장의 부관 김오랑 소령은 총격전 중 사망했다.[4]

다음날 아침까지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모두 반란군에 점령당했다. 전두환과 그의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 예컨대 제9사단 사령관 노태우 소장과 정호용 소장 등이 한국 지상군을 지휘했다. 전두환의 쿠데타와 그 이후의 권력 장악은 하나회로 알려진 군 고위 장교들의 강력한 사조직의 지원을 받았다.[5] 대한민국 해군공군은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았고, 전두환은 쿠데타 성공 후 이들을 끌어들였다. 전두환은 권한대행 최규하 대통령이 아닌 사실상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이 쿠데타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0년 5월 17일의 쿠데타, 그리고 광주 민주화 운동[6]은 전두환이 1995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체포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7. 관련 작품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영화



; 텔레비전 드라마

참조

[1] text
[2] 뉴스 기무사 '37년 소격동시대' 마감... 과천 이전 https://www.donga.co[...] 2008-11-19
[3] 뉴스 7월 26일은 비운의 진짜 군인 장태완(張泰玩) 장군 사망일 - 개미뉴스 http://www.antnews.c[...] 2022-01-14
[4] 뉴스 The harrowing real-life stories of the Korean military coup depicted in "12.12: The Day" https://english.hani[...] 2023-11-29
[5] 뉴스 육사·하나회·쿠데타 질긴 인연 전두환과 노태우... 죽음도 '추종' https://www.newspim.[...] 2021-11-23
[6] 뉴스 [영화는실화다] 영화 '서울의 봄'_ 12·12 군사 반란 https://n.news.naver[...] 2023-11-24
[7] 뉴스 <방송> MBC「제4공화국」12.12사태 재현 https://n.news.naver[...] 1995-10-31
[8] 뉴스 '제5공화국', 12.12 장면 방송에도 시청률 하락 https://entertain.na[...] 2005-05-16
[9] 뉴스 12·12 다룬 '서울의 봄'과 '제5공화국'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https://ilyo.co.kr/?[...] 2023-11-29
[10] 웹사이트 오 유튜브에 서울의봄 올라왔는데? https://www.flayus.c[...] 2023-12-09
[11] 뉴스 許和平의원,'제4공화국'.'코리아게이트' 고소 https://n.news.naver[...] 1995-12-07
[12] 영상미디어 [신비한TV 서프라이즈] 1979년 12월 12일, 작전명 '생일 집 잔치'. 전두환을 필두로 한 10.26 사건으로 촉발된 그날 밤의 이야기, MBC 231203 방송 https://www.youtube.[...] MBC 미스터리 : 심야괴담회 X 서프라이즈 2023-12-03
[13] 웹사이트 지금 서프라이즈에서 서울의 봄 스포중... https://dprime.kr/g2[...] 2023-12-03
[14] 간행물 憲法 빠른 기간내 改正 새大統領 法定時日内 먼저선출 殘餘任期다안채우고 選擧실시(憲法 早い期間内に改正 新しい大統領 法定時日内にまず選出 残余任期全て満たさずに選挙実施)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1979-11-10
[15] text
[16] 간행물 拘束人士68명 석방 文益煥・咸世雄씨둥 포함 不拘束2百24명免訴(拘束人士68名釈放 文益煥・咸世雄氏など含む 不拘束224名免訴) http://gonews.kinds.[...] 동아일보 1978-12-08
[17] text
[18] text
[19] text
[20] 서적 歴史群像No.91「戒厳令下で勃発した流血の反政府騒乱・光州5.18事変」 Gakken 2008-10
[21] 웹사이트 “12·12는 군형법상 명백한 반란”/당시 육참총장정승화씨 인터뷰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中央日報) 1993-05-14
[22] 웹사이트 청와대-백악관 X파일(25) "전두환 제거할테니 미국이 밀어달라" 30여명의 장성들 역쿠데타 지원 요청하다 http://www.wikileaks[...] 위키리크스한국 2018-09-22
[23] text
[24] text
[25] text
[26] text
[27] text
[28] text
[29] text
[30] text
[31] text
[32] text
[33] text
[34] text
[35] text
[36] 일반
[37] 일반
[38] 일반
[39] 일반
[40] 일반
[41] 일반
[42] 일반
[43] 일반
[44] 일반
[45] 일반
[46] 일반
[47] 일반
[48] 일반
[49] 일반
[50] 일반
[51] 일반
[52] 일반
[53] 일반
[54] 웹사이트 12.12직후 전두환 제거 역쿠데타 모의있었다[이우호] https://imnews.imbc.[...] 문화방송 1999-05-16
[55] 웹인용 12·12군사반란(十二十二軍事叛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0-04-20
[56] 서적 12·12 사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http://ch.yes24.com/[...]
[57] 웹인용 12.12 는 정당한 법집행 이었다. https://bemil.chosun[...] 2024-02-09
[58] 웹인용 12·12에 대한 영화와는 다른 각도의 ‘기억’ https://www.pennmike[...] 2023-11-28
[59] 뉴스 金載圭 단독계획 犯行 https://www.donga.co[...] 동아일보 1978-11-06
[60] 뉴스 신군부의 등장과 집권 공작 http://www.kopf.kr/n[...] 자유언론실천재단 2022-09-28
[61] 뉴스 "총구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정승화 전육참총장이 말하는 「12·12사태」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87-11-11
[62] 일반
[63] 웹인용 (22) "「슈퍼살롱」을 찾아라" 긴급명령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1987-11-14
[64] 웹사이트 http://www.nocutnews[...]
[65] 웹인용 “軍에 법을 무시하는 오점 남겨” https://www.sisajour[...] 시사저널 1990-01-21
[66] 영상 639회 군사반란, 26년만의 증언 MBC 2005-06-21
[67] 웹인용 <정승화씨 12.12관련 증언요지>...(1) https://www.hankyung[...] 한국경제 1993-06-26
[68] 뉴스 잊혀진 죽음, 정선엽·박윤관 두 사병도 기억하라 http://www.hani.co.k[...] 한겨레 2013-05-21
[69] 웹인용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5-12-06
[70] 영상 12.12 2부 승자와 패자 https://www.youtube.[...] KBS 1993-12-12
[71] 영상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 총리공관 무력장악 https://news.kbs.co.[...] KBS 1995-12-06
[72] 웹인용 신현확 육성증언(上), 12.12 밤에 정승화 체포 재가 끝까지 반대 https://www.pennmike[...] 펜앤드마이크 2019-01-10
[73] 웹인용 "12.12" "5.18" 9차 공판 중계(1) https://m.mk.co.kr/n[...] 2024-02-12
[74] 웹인용 5. 12.12의 육군본부 http://www.systemclu[...] 2024-02-06
[75] 웹인용 "12.12" "5.18" 9차 공판 중계(1) https://m.mk.co.kr/n[...] 2024-02-06
[76] 웹인용 -(3) https://www.yna.co.k[...] 2024-02-12
[77] 서적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 제2권 8개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상)
[78] 뉴스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진압 실패 10시간)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06-05-16
[79] 뉴스 촛불집회 진압 병력, '12.12 군사쿠데타' 부대와 똑같았다. http://www.impeterne[...] 아이엠피터뉴스 2018-07-09
[80] 웹인용 12.12군사반란과 어리석은 군인 김오랑 https://www.kdemo.or[...]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12
[81] 영상 "상관·부하를 쏴죽여라" 명령한 장태완 /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부단장 출연 [제5공화국 역사의 증언] https://www.youtube.[...] 펜앤드마이크TV 2021-12-03
[82] 인용문
[83] 뉴스 美, 12.12 당시 北 군사행동 가능성 `50%' 판단 http://news.nate.com[...]
[84] 뉴스 美 12.12직후 신군부에 불만..보름뒤 묵인(종합) https://news.naver.c[...]
[85] 뉴스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전 수도경비사령관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0-01
[86] 뉴스 [10·26 40주년]① 궁정동의 총소리…엇갈리는 평가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9-10-25
[87] 서적 지는 별 뜨는 별: 청와대 실록 한국문원
[88] 서적 지는 별 뜨는 별: 청와대 실록
[89] 기타
[90] 뉴스 비운의 장군 장태완 '당신은 정말 떳떳한가?' http://www.sisajourn[...] 충청일보 2017-03-25
[91] 웹인용 전쟁과 독재에 울고 혁명·올림픽에 웃다 https://www.sisajour[...] 시사저널 2009-11-28
[92] 판례
[93] 웹인용 청와대 탱크 진격명령 내린 만취 사령관 https://www.newdaily[...] 2024-02-09
[94] 웹인용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12. 12 사건은 쿠데타도, 군사반란도 아니다 http://www.nabuco.or[...] 2024-02-09
[95] 보고서
[96] 뉴스 최규하 “총재님, 어젯밤 죽을뻔 했시유” … 상기된 목소리로 JP에게 하소연했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10-24
[97] 뉴스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전 수도경비사령관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0-01
[98] 영상 1979 서울점령 : 운명의 레이스 SBS 2021-03-11
[99] 뉴스 [참성단]"서로 사랑하세요" http://www.kyeongin.[...] 경인일보 2019-02-15
[100] 뉴스 [왜냐면] 기미년, 탄허 큰스님과 정승화 / 원행 스님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12-10
[101] 뉴스 공수 1여단, 한강을 건너다! https://www.chogabje[...] 조갑제닷컴 2016-06-28
[102] 뉴스 12.12 쿠데타의 분수령 "9공수여단의 回軍" https://www.nocutnew[...] 노컷뉴스 2013-08-19
[103] 웹인용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대통령 정무수석 (上)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2-03
[104] 웹인용 [공판중계] 윤성민 "합수부측 행동은 명백한 반란"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4-02-07
[105] 웹인용 드러난 12.12사태 진상-검찰이 밝힌 전모 https://www.joongang[...] 2024-02-09
[106] 웹인용 12.12 5.18사건 18차공판 지상중계 https://www.joongang[...] 2024-02-09
[107] 웹인용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http://cnu518.jnu.ac[...] 2024-02-09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